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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기억>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 인터뷰관리자작성일 20-06-19 15:20



제목 백년의 기억

영제 Korea, A Hundred Years of War

감독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출연  이호철, 박원순, 리종혁, 도날드 그레그, 찰스 암스트롱,

안드레이 란코브 등 세계 각국 남북 관련 관계자

장르  다큐멘터리

수입/배급  전국예술영화관협회(씨네아트 리좀 외 14개관)

배급총괄  에무시네마

러닝타임  112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0년 6월 11일



 

Director's Interview

Q. 무엇이 남북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나?

  나는 1971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건 우리 세대에게 큰 사건이었고, 어머니가 독일 분이신 나에게는 더 큰 이슈였다. 1990년도에 신입 방송기자로 활동을 시작할 때, 독일 통일의 결과에 대해서 많이 보도했다.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이후의 동유럽 및 구소련에 대해서 보도했고. 2000년까지는 유럽에서 잘 알려진 공중파 방송국 ARTE의 저녁 뉴스 기자로 활동했다. 그 당시 김정일과 김대중의 만남을 보도하게 되었는데, 그해 처음으로 남한을 방문했다. 동행한 한국인 통역자가 남북 정상의 만남을 생중계로 보면서 북한 사람들이 뿔을 달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어찌나 놀라워하던지 그 모습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1980년대에 학생이던 그녀는 그렇게 남한으로부터 프로파간다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남북 이슈가 내가 읽은 간단한 줄거리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북한은 단순히 구소련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기독교주의, 봉건제도, 유교를 비롯한 많은 영향을 북한화한 김일성의 의지가 실현되어 있는 곳이다. 이에 대해서 2003년에 ARTE에서 첫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북한으로 갈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서 주로 아카이브와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로 다큐멘터리를 구성했다. 곧 DPRK 비자를 발급받게 됐고, 2010년에는 ARTE에서 다시 한번 남북 분단의 역사, 한반도의 지정학적 의미와 상호의존성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Q. 본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 관련해서

<프론티어와의 전쟁>(2003),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2013) 두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백년의 기억>(2019)은 피에르 감독의 인생을 바쳐 20년 동안 한반도 이슈에 대해 연구한 최고의 결과물인가? 최근 작품까지의 작업 과정은 어떤 식으로 발전해왔는지?

  맞다. <백년의 기억>은 이전 두 작품을 기반으로 완성했다.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은 2010~2013년에 만들었다. 3년이나 걸린 이유는 남북 양 국가를 설득하기가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자세한 조사에 북한의 참여를 허락받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영화는 유럽과 그 밖의 나라들에 큰 영향을 주었고, 남북한의 시각으로 분단 상황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유럽인들의 공감도 끌어낼 수 있었다.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은 김정일의 죽음으로 끝난다. 2018년에는 김정은, 문재인 그리고 도날드 트럼프의 만남으로 새롭게 발전한 내용을 모두 담고 싶었다. 20년 동안 남북 정치를 연구해오면서 너무 낙천적인 예상은 믿지 않게 되었다. 너무 비관적인 예상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본 영화에서 다룬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북관계의 놀라운 희망을 보여준다. <백년의 기억>은 이전 두 작품의 최신 버전이다. 30% 이상 새로운 소재들이 추가됐다. 하지만 가장 최근의 한반도 이슈는 훨씬 이전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이해하고 현재로부터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이 <백년의 기억>에 힘을 불어넣는 요소이다.ㅁ

  남과 북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처음에 가장 관심이 간 것은 북한이 미지의 세계라는 점이었다. ‘갈 수 없는 나라’라는 신화 같은 것 말이다. 그동안 북한은 8번, 남한은 15번 정도 방문했지만, 새롭게 발견하고 알아갈 수 있는 것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두 번째로 관심이 간 것은 프로파간다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한반도라는 점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파간다 구조 중 하나인 북한만이 연구 대상은 아니다. 제3자인 우리가 자라온 나라의 프로파간다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도록 잘 감춰져 있다. 한반도 분쟁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이야기를 분석하는 작업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Q. 본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북한 당국을 설득하는데 3년이 걸렸는데 그 과정은 어땠는지?

  북한을 촬영하는 일은 정말 조심스럽다. 기자들이나 영화제작자들은 대부분 북한에 도착하면 프로파간다만 보여줄 것이라고 걱정한다. 일부는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북한 사람들은 본인의 행동이나 말이 영화에서 나쁘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이 제대로 전달되거나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을지 몰라도 2000년 당시에는 정말 심했다. 그래서 신뢰를 쌓는 일이 중요했다. 나는 모든 작업 결과를 한 번 더 체크하겠다고 먼저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주장을 진심으로 듣고 그들의 입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대화가 있었다. 다행히 마지막에는 잘 풀려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위 간부들의 인터뷰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본 영화를 본 북한 관계자는 영화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입장이 진솔하게 드러났다고 느끼고 있다.

Q. 인터뷰 대상은 어떻게 선정하게 되었는가? 선정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방식이나 규칙이 존재 했는지?

  우리는 항상 인터뷰에 최고로 적합한 사람들로 인터뷰 대상자를 선정하고 가능한지 물어보았다(웃음). 둘째로, 가능하다면 역사적으로 그 순간에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싶었다. 단순히 해설자나 학자들같이 제2의 분석자가 아닌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인터뷰 대상이 과거의 산증인으로서 당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상황에서 어떤 느낌이었는지에 집중하게 하는 인터뷰 기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확실한확실한 사실을 찾으려고 했다. 예를 들면, “북한이 서울을 정복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지?” 또는 “핵의 위협에 대해서 언제 처음으로 들었는지?” 또는 “부시 전 미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을 때 어디에 있었는지?” 또는 “1994~2000년의 기근 때문에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또한 우리는 항상 대칭되게 인터뷰를 하려고 했다. 만약 우리가 서울 시장을 인터뷰한다고 하면 평양 시장도 인터뷰하려고 했다. 이 과정은 꽤 잘 진행됐다. (PS: 남북 모두 더 서로 직접적으로 대칭되는 대상이 없는 점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Q. 가족 중에 한국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관계인지?

  사실 한국과는 개인적인 관계가 있다. 부모님께서 두 명의 아이를 입양하셨다. 한 명은 1977년에, 다른 한 명은 1981년에 입양됐다. 그들은 우리 가족과 함께 자랐고 실제로 내 여동생과 남동생이다. 동양인처럼 보이지만 프랑스 이름을 가지고 있고 한국말은 하지 못한다. 그들은 유럽인이다. 개인적인 배경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낯설지 않았지만, 관련해서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한국에 대한 상투적인 단어들만 알았다. 삼성, 강남, 김치 이런 것들이다. 한반도에 대한 작업은 나의 개인적인 배경보다는 기자 활동과 최근의 경험들에 더 많이 연관되어 있다.

Q. 영화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가 있을 정도로 귀한 기록물이 많다. 북한에 관련된 자료는 어떻게 구했는지?

  조선영화사에 있는 북한 동료들과 신뢰가 쌓이면서 흥미로운 아카이브를 수집하는 것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전쟁에 관련된 상당한 자료들을 제공했다. 그 외에 1950년대 이전의 북한 사진자료는 러시아로부터 수집했고, 1980년 캄보디아 왕의 평양망명과 관련된 자료는 오래된 프랑스 보도방송에서 찾았다. 1951년 서울 수복 과정에서 당시 미군이 찾은 북한의 자료를 미국에서 얻을 수 있었다. 1960년 박정희 정권 당시 남한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집단체조 사진이 오늘날 북한의 집단체조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많은 사람들은 남과 북의 사회가 얼마나 다른지 알고 있다. 마티유 판사드 촬영 감독은 본 영화에서 겉으로 드러난 이념적 대립,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벽을 넘어 실제 사회를 보려고 했다. 물론 남한과 북한은 같은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언어와 역사, 노래, 음식, 예절 등을 공유하고 있다. 양 국가의 공통점을 찾는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Q. 남한 인터뷰 대상은 어떤 방식으로 선정했는가? 박원순과 김문수는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남한의 민주주의는 정말 활기차다. 남한에는 북한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이 상반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햇볕 정책을 지지하는 인터뷰만 하고 싶지 않았다. <백년의 기억>에서는 남한 내부에서도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명박과 박근혜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Q. 관객들이 영화로부터 느꼈으면 하는 점?

  나는 외국인이다.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와 역사를 세세히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다. 남과 북을 모두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백년의 기억>을 보는 모든 관객이 한반도 분단의 비극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특히 북한에 갈 수 없는 남한 국민들에게 말이다. 만약 이 영화가 DMZ 위로 작은 다리를 놓을 수있다면 정말 자랑스러울 것이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지만, 비록 편집의 마법이라 할지라도, 영화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한국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영광스럽게 느끼고 행복하다. 항상 희망했던 일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한국 관객에게 이 영화의 관람은 힘든 경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사실 기반의 접근을 통해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놀라운 자료들로 구성돼있다. 제3자인 외국인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영화에 한국인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Q.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

  2011~2013년에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 쓰는 것은 정말 어렵고 복잡한 일이었다. 역사와 역사의 기록도 전쟁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뉴스 사이트나 탈북자의 증언, 고위 간부 간의 논의를 통해서 정보를 얻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다. 당시에는 정보의 낮은 신뢰성이 큰 어려움이었다.

더 어려웠던 점은 영화를 찍기 위해서 북한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2년 6개월 동안의 치열한 협의 끝에 마지막으로 북한이 우리를 평양으로 초대했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영하 25도로 정말 추웠다. 우리는 고위 간부를 인터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관계자는 아직도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왜 북한 관점의 영화와 남한 관점의 영화로 두 편을 만들지 않는지”, “영화에는 5분만 사용한다면서 왜 한 시간 이상의 긴 인터뷰를 요청하는지”를 물었다. 대본의 정확한 내용을 물어보기도 했다.

영화를 한 편으로 만들어야 훨씬 더 재미있고 의미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는 데 3개월이 더 걸렸다. 내 흰머리도 더 늘었다. 다른 국가들처럼 북한에도 여러 입장이 있었다. 누가 비둘기고 누가 매인지, 누가 개방적이고 누가 배타적인지 잘 봐야 했다.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은 정말 면밀한 관찰을 요구했다.

Q. 영화제작 과정 중 이야기하고 싶은 에피소드?

  정말 많다. 촬영 초기에는 한반도 태권도 역사에 대해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태권도는 남북 전통 스포츠다. 태권도 무술은 남북에 공존하는 동시에 둘로 나뉘어 있다. <백년의 기억>에는 기술 동작만 사용했다. 태권도의 기술 동작은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금강’, ‘단군’, ‘고려’ 같은 기술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남과 북이 공유하는 문화와 역사를 증언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주체’라는 기술이 남한에서는 아직도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동작은 남한 밖에서 한국인이 아닌 무술 전문가와 촬영했다.




 


  Director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Pierre-Olivier Francois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은 197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파리ㆍ베를린ㆍ보르도 등에서 정치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은 독일인 어머니를 둔 그에게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 방송기자로 활동하면서 독일의 통일에 대해 꾸준히 보도했고, 공산주의 이후의 동유럽과 구소련을 연구했다.
10년 동안 프랑스 방송국 아르떼(Arte TV)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으며 2000년부터는 다양한 국제 채널의 작가 및 다큐멘터리 제작자 및 감독으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사이버 전쟁, 알츠하이머라는 질병, UN 평화유지군, 피아니스트의 삶 등 한반도 이슈 외에도 아주 다양한 주제를 다룬 15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베테랑 감독이다.
2019년 제1회 평창남북평화영화제(<백년의 기억>(2019)),제11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평양 유랑>(2019)) 등에 초청되어 한국의 관객들을 만났다.



 

 DOCUMENTARY FILMOGRAPHY

평양을 즐겨요2019, 라사나 바실리, 영웅2019,
공연의 비밀, 클라라 하스킬2017,
UN, 지옥의 마지막 역2015, 세번째 수영2015,
WE LISTEN TO US2015, 한국은 통일할 수 없을까?2013,
알츠하이머, 시간과의 경쟁2011,
SODA: THE MAGIC FORMULA!2010,
러시아인의 꿈의 도시2009, ONCE UPON A FRENCH FRY2007,
프론티어와의 전쟁2003, PIZZA NOSTRA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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