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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강원트리엔날레 2021] ‘모빌리티(Mobility)’와 비대면 시대의 온라인 미술”에 관한 두 개의 근본적 질문관리자작성일 21-09-30 00:00



 

[국제강원트리엔날레 2021] 안진국의 “‘모빌리티(Mobility)’와 비대면 시대의 온라인 미술”에 관한 두 개의 근본적 질문
심은록 (동국대 겸임교수, 미술비평)

[질문 1] 사상사적으로 볼 때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모빌리티”는 서양보다 동양에서 좀더 흥미있게 발전될 소지가 많다고 봅니다. 서양에는 ‘부동’에 무게 중심을 둔 파르메니토스와 플라톤[1], 이를 보완하는 ‘동’에 좀더 초점을 맞춘 헤라클레이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서, 이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시공간적 조건을 달리하며 이어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주역을 비롯하여, 한국에서는 조선 500년동안 이기론(理氣論)을 논쟁할 정도로, 광의적 의미에서 ‘모빌리티’가 더욱 심도있게 다뤄졌었다. 안진국 평론가 글의 컨텍스트는 서구를 바탕으로 하기에, 아쉽지만 여기에서는 동양은 유보하기로 한다. 서양사에서 ‘모빌리티’를 이야기 할 때, 그것이 협의적이든 광의적이든, 혹은 인문사회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전제되는 것은 각 시대 시공간을 먼저 정확하게 구별 및 구분하고 관점을 파악한 후에 모빌리티를 이야기 한다. 더욱이 현재 ‘디지털세계’[2]와 물리적 세계, 특히 C세대의 경우는 2원론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차이가 분명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물리적세계의 우연성(‘랜덤’과는 다른 의미)과 인식불가능성이 없는, 컴퓨터 언어로 구성된 디지털세계는 근대 이상으로 논리적이며, 시공간도 더욱 세분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컴퓨터 언어에 부합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거나 배제되고, 또한 user들은 조금의 항거도 없이 바로 수긍하며, 그 논리에 복종한다. 여기에서 질문은 안진국의 글에서는 “현존하는 것의 사라짐”, “부재한 것의 나타남”, “사이공간”, 등을 포함한 다수의 표현이, 디지털세계와 물리적 세계[3]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이 두 세계를 좀더 명료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물리적 세계에 대해서는 이미 세계적인 석학들이 많은 의견을 제시했으므로, 이제는 좀더 디지털세계에서의 주체, 객체, 진리(니체적 의미)의 구성조건을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에 근거하여, 디지털세계를 “지리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이 사라진 무공간적 공간/무시간적 시간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굴레를 벗어난 창작과 감상이 가능해진다.”고 했는데, 성립가능한 언표인지 묻고 싶다. 디지털 세계에도 하드웨어가 있고, 우리의 정신에도 몸이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다 사라지면 그때 공간과 시간이 없어진다”고 했다. 즉 물질과 시공간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은 하드웨어와 디지털통신이 발전됨에 따라 거의 무한하다고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메타버스나 디지털 월드는 여기에 일부러 공간을 한정한다. 또한 넓은 의미의 XR, 메타버스의 세계도 무시간, 무공간이 아니며,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이러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세분화된 타임라인과 카메라 view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를 구축하는 프로그래머나 프로그램의 목적에 따라 다른 시공간을 책정하기에 무수히 많은 듯한 시공간이 있는 듯 착각이 될 뿐이다. 칸트가 ‘인간의 인식한계는 무한과 영원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무시간, 무공간은 아직까지는 인간 인식론에 의하면 불가능하다. AI 역시 이제는 지도학습을 통한 머신 러닝이 아니라 빅데이터 기반의 딥 러닝을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AI의 시공간 인식도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아직은 두 세계의 실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수이기에, 먼저 이 둘을 명료하게 구분 지어서 비교연구하고, 그 다음에 이 두 세계의 소통을 재현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질문2] 안진국 평론가의 텍스트는 존 어리가 언급한 “부재적 현존”(absent presence), 현존적 부재 (present absence)에 대해 다루고 있다. 부재적 현존을 다룰 때, 학자에 따라서는 “현존의 부재” (absence of presence)를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이 글에서는 제외 되었다는 것은 ‘신체’가 간과되는 것은 아닌가? ‘몸’에 대한 언급이 제외된다면, 예술가들은 디지털세계에서 어떻게 고양되고 숭고한 소통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현재에 대한 책임[4]을 질 수 있을까?

 “현존의 부재”[5] 중의 한 예로, MZ세대나 C세대의 경우 버스 정류장에서나 승강기 내에서 서로 현존하지 않는 것처럼 모른 척 한다. 반면에 몸의 사용법에 익숙하고 그 소중함을 잘 아는 연세가 든 어르신 일수록 쉽게 소통을 시작한다. 그러나, MZ세대나 C세대의 현존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몸’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의 시각화를 통해서, 디지털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성, 사물과의 공존, 등을 현대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현재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실제 몸과 얼굴이 드러나는 메타버스, 가상오피스, 가상 클래스 같은 디지털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예의를 차리고 조심하며, 서로 존중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직까지는 가상 혹은 디지털세계가 현실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몸이 디지털세계로 확장되고 연장되어야 한다[6]. 예전과는 반대로 이성이 아니라, 현시대에서는 ‘몸’의 현존이 관계성을 고양시키고 존엄성을 디지털세계까지 연장시킨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이 현시대에 다시 요청된다. 몸과 정신을, 물리적세계와 디지털세계를 좀더 명료하게 알기 위해 분리시켜 비교연구한 후에, 이 둘의 소통의 필요성을 감각적으로 상기시켜야 하는 것이 오늘날 예술가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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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라톤의 경우, 부동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지계의 Idea는 부동이나 가시계는 동적이며 계속 변하는 허상이다. 부동이론을 시작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은 이후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발전되고, 이는 현재 물리학에 영향은 주었다.  

[2] 디지털전자통신망을 매개로 하며, 특히 현재 많이 논의되는 메타버스, XR, 온라인 소통, 전시, 행사 등이 이뤄지는 세계, 이하 ‘디지털세계’로 표기. 

[3] 신체와 함께 소통하는 현실적 세계, 이하 ‘물리적 세계’

[4] ‘힐링아트’의 현대적 시조인 요제프 보이스는 “미술은 현재의 상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85년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의 한 강연에서, “우리의 중요 현안인 자본주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없다면, 그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발터 벤야민은 교육과 관련하여, “수업을 예술작품과 연관하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보이지 않았으며, 현대 예술에 대한 관심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었다”고 말하며, “이 학교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수업과 평가」)고 질책했다.

[5]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적 부재”와는 다른 의미. [6] ‘메타버스 metaverse’는 ‘메타Meta’와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유니버스라는 시공간적 전제 후에, 메타가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a 즉, 자연학(Physics)의 뒤에(Meta)에서 유래된 것처럼, 자연, 물질, 몸, 이후에 혹은 근거해서 다뤄질 수 있는 것이다.